AI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대체한다는 말을 요즘 자주 듣습니다. 특히 다년간의 교육과 도메인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에서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AI가 밀어내는 것은 전문성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전문성을 하나의 영역 안에서만 쓰는 방식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20년 동안 마케팅을 해왔지만 처음부터 마케팅만 한 사람은 아닙니다. 미술을 공부했고, 애니메이션과 영상을 만들었고, 디지털 휴먼과 VR을 했고, 콘텐츠와 기술 사이에서 일했고, 지금은 AI와 마케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제 커리어에서 가장 큰 자산이 된 것은 각각의 전문성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해서 하나의 판단으로 만드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AI가 그 능력의 값을 훨씬 크게 만들고 있다고 느낍니다.

실행이 쉬워질수록, 무엇을 할지가 어려워집니다

얼마 전까지 조직에서 가장 비싼 것은 실행력이었습니다. 좋은 카피를 쓰는 사람, 디자인하는 사람, 코드를 짜는 사람,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래서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든 사람이 귀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코드도 카피도 이미지도 영상도, 일단 시키면 결과물이 나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이걸 써도 되는가. 우리 브랜드에 맞는가. 고객이 정말 원하는 것인가. 지금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조금 고쳐야 하는가, 아니면 아예 버려야 하는가.

실행이 빨라진 만큼 판단의 무게가 커졌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에이전틱 AI 시대, 증강된 전문가』에서 했습니다. 증강된 전문가는 AI를 많이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경험과 전문성을 가지고, AI가 쏟아내는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무엇을 고를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AI가 실행을 증폭한다면, 사람에게 남는 자리는 점점 판단 쪽으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저는 융합전문가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융합은 이것저것 조금씩 아는 제너럴리스트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습니다.

하나의 전문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다른 영역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

디자인만 보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비즈니스의 언어로 볼 수 있는 사람. 기술만 보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고객 경험의 언어로 옮길 수 있는 사람. 마케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과 시장과 브랜드를 함께 보는 사람.

이런 사람은 각 영역에서 그 분야 전문가만큼 깊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신 서로 다른 전문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무언가 어긋나는 것을 발견합니다.

예쁘지만 팔리지 않는 것. 기술적으로 가능하지만 사업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것. 고객에게는 좋은데 브랜드에는 맞지 않는 것. 만들 수는 있지만 지금 만들 필요는 없는 것.

저는 이 어긋남을 발견하는 능력이 AI 시대의 중요한 전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Netflix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지난 7월 19일 Lenny’s Podcast에 Elizabeth Stone이 나왔습니다. Netflix의 Chief Product and Technology Officer이고, 엔지니어링과 프로덕트와 디자인을 함께 보고 있습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갔지만 제 눈을 잡아끈 것은 채용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Netflix가 이제 단일 영역의 전문성만 보지 않는다는 것.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문제의 전체 구조를 볼 수 있는 사람, 시스템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을 더 중요하게 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회차 제목이 그 대비를 그대로 달고 있습니다. 시스템 사고자에게 베팅한다,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그중에서도 오래 남은 대목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주니어가 반복적인 실행을 직접 해보면서 크래프트를 익혔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 반복을 AI가 상당 부분 대신해 주는 환경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결과물이 좋은지 나쁜지는 누가 판단하는가.

AI가 결과물을 만들어 주는 것과, 좋은 결과물을 알아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니까요. Stone은 프로덕션에 내보내는 결과물의 품질에 대한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 책임이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고 봅니다. 만들어지는 양이 늘었으니까요.

Stone은 좋은 결과물을 알아보는 눈이 매우 희소한 역량이라고 말합니다. 그 눈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고, 경험과 좋은 사람에게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다고요. 저는 여기에 하나를 더 붙이고 싶습니다. 수많은 결과물을 보고 비교하면서 자기 기준을 세우는 시간이요.

AI가 실행을 쉽게 만들수록 이 능력이 오히려 귀해지는 셈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제가 오래 이야기해온 안목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AI를 도입했다고 성과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한 사람의 감상이 아니라 조사에서도 비슷하게 나옵니다.

Atlassian이 올해 4월에 낸 State of Teams 2026을 보면, 임원의 89%가 AI로 속도가 빨라졌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전사 차원의 AI 성과를 보여줄 분명한 사례가 있다고 답한 임원은 6%였습니다.

McKinsey의 2025년 State of AI 보고서에서도 기업 AI 도입률은 88%인데, 전사 수준에서 영업이익에 영향을 봤다고 답한 비율은 39%였습니다.

AI를 쓴다는 것 자체는 이제 차별점이 아닙니다.

같은 도구를 가지고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능력이 차이를 만듭니다. 도구를 고르는 사람, 질문을 만드는 사람, 결과를 평가하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에 이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요.

Atlassian 조사에서 AI 성과를 실제로 만들어낸 팀은 14%였는데, 그들의 공통점도 새로운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일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래 일한 사람에게 기회가 있는가

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경험을 많이 쌓은 사람에게 꽤 좋은 국면이 열리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경험 그 자체는 아직 자산이 아닙니다. 20년을 일했다는 사실은 이력입니다. 그 20년 동안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골랐고, 무엇을 버렸으며, 어느 순간에 판단을 바꾸었는지가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자산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Experience to Meaning이라는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경험을 경력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의미로 번역하고, 기준으로 만드는 과정이요.

가장 작게 시작하는 방법

거창한 것부터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주에 내린 판단 세 개만 적어보면 됩니다.

무엇을 골랐는지보다, 왜 그것을 골랐는지. 무엇을 만들었는지보다, 무엇을 버렸는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했는지.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런데 몇 개가 쌓이면 패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반복해서 중요하게 보는 것. 다른 사람들은 지나치는데 나는 먼저 발견하는 것. 반대로 다들 중요하다고 하는데 나는 굳이 하지 않는 것.

그게 당신의 전문성 안에 숨어 있던 판단 기준입니다. 그리고 아마 AI가 가장 복제하기 어려운 부분일 겁니다.

한 분야를 20년 판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안에서 무엇을 발견했고, 그것을 다른 영역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가.

앞으로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AI가 실행을 싸게 만들수록, 경험을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실행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연결하고 판단하는 힘일 테니까요.

Execution is getting cheaper. Judgment is not.


출처

Lenny’s Podcast, “Why Netflix is betting on systems thinkers—not specialists—in the AI era | Elizabeth Stone (CPTO)”, 2026년 7월 19일.

Atlassian, “The State of Teams 2026”, 2026년 4월 27일.

McKinsey & Company, “The State of AI in 2025: Agents, Innovation, and Transformation”, 2025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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